우리 역사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린 나라, 발해를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시나요? 아마 광활한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강력한 기마 군단의 모습일 겁니다. 하지만 발해의 진정한 힘은 땅뿐만 아니라, 드넓은 바다를 무대로 펼쳐졌습니다. 발해는 단순한 고구려의 후예를 넘어, 당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북아의 국제 질서를 주도하고, 독자적인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한 해양 강국이었습니다. 오늘은 강대국 당나라와의 복잡미묘한 관계 속에서 발해가 어떻게 자신만의 외교 전략을 펼치고 바다를 지배했는지,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북방의 강자, 발해의 탄생과 고구려 계승
668년,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고구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끈 대조영은 당나라의 혼란을 틈타 동쪽으로 이동, 698년 마침내 ';진국(振國)'을 세웁니다.

이것이 바로 발해의 시작이었죠.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스스로 '고려(고구려) 국왕'이라 칭하며 일본에 국서를 보내는 등,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영토 회복을 넘어, 고구려의 문화와 기상까지 잇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2. 긴장과 경쟁: 발해와 당의 첫 만남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입장에서, 고구려의 부활을 외치는 발해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발해 역시 당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죠. 2대 무왕(武王) 시기에는 갈등이 폭발하여, 발해 수군이 바다를 건너 당의 산둥반도를 직접 공격하는 대담한 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당나라는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남쪽의 신라와 손을 잡고 발해를 압박하는 등, 양국의 관계는 한동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발해의 건국은 당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던져진 새로운 도전장이었습니다. 힘과 힘이 부딪치는 경쟁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3. '해동성국', 경쟁을 넘어 공존으로
끝없이 대립할 것 같던 두 나라는 3대 문왕(文王) 시기에 접어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군사적 충돌 대신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활발한 교류를 시작한 것이죠. 이 시기, 당나라는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부르며 그 번영을 인정했습니다.

3.1. '해동성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일각에서는 이를 당에 복속된 것처럼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는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과 경제력, 안정된 국가 시스템을 인정한 '찬사'에 가깝습니다. 당시 발해는 당의 빈공과(외국인 대상 과거 시험)에서 신라와 수석을 다툴 만큼 인재를 배출했고, 화려한 유약을 바른 건축물과 수준 높은 공예품은 주변국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당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강국으로 성장한 발해를 외교 파트너로 인정한 것입니다.
3.2. 황제국을 지향한 자주 국가
발해가 자주적인 국가였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발해는 '인안(仁安)', '대흥(大興)'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으며, 왕을 '황상(皇上)'이라 칭하는 등 황제국 체제를 운영했습니다. 이는 당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국가임을 내외에 과시한, 발해의 자신감 넘치는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4. 북방의 바닷길: 동북아 해상 실크로드를 열다
발해의 진정한 저력은 바로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발해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해와 황해를 잇는 거대한 해상 교역 네트워크, 즉 '동북아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발해의 경제를 살찌우고, 외교 무대를 넓히는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4.1. 5개의 길, 세계로 뻗어 나가다
발해의 수도 상경성에서 시작된 5개의 교통로(5도)는 동북아 전역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육로인 거란도, 영주도 외에 바닷길인 '일본도(日本道)'와 '신라도(新羅道)'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과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고 200여 년간 34차례나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긴밀히 교류했습니다. 당나라와는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를 통해 교역했는데, 이곳에는 발해 사신과 상인들을 위한 공식 숙소인 '발해관(渤海館)'이 설치될 정도였습니다.
4.2. 발해의 '명품', 세계를 사로잡다
이 바닷길을 통해 무엇이 오갔을까요? 발해는 담비 가죽을 비롯한 최상급 모피, 인삼과 꿀 같은 약재, 그리고 명마(名馬) 등을 수출했습니다. 이 물품들은 당과 일본의 귀족 사회에서 최고의 사치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중앙아시아 상인들까지 발해의 모피를 구하기 위해 '담비길(Sable Road)'이라는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했다는 연구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 대가로 발해는 당의 비단, 서적, 도자기 등 선진 문물을 수입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가꾸었습니다.
5. 단순한 '지방정권'이 아닌, 발해의 진정한 유산
일부에서는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폄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발해의 역동적인 외교와 찬란한 문화를 외면한 왜곡된 시각입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온돌 문화를 계승하고, 독자적인 관료제(3성 6부)를 운영했으며, 주변국과 대등한 관계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 명백한 독립 국가였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며 동북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넓은 역사적 시야와 자긍심을 일깨워 줍니다."
강대국과의 관계를 때로는 경쟁으로, 때로는 협력으로 이끌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던 발해. 그들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발해의 역사를 단순한 과거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유연한 외교 전략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 자료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려-거란 100년의 서사: 강동 6주, 전쟁과 외교를 넘나든 생존의 기술 (0) | 2025.09.06 |
|---|---|
| 발해–거란 관계, 그리고 신라·일본과 얽힌 동아시아 국제질서 (0) | 2025.09.05 |
| 신라의 삼국 통일: 승자의 기록 너머,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 (0) | 2025.09.04 |
| 수·당과 고구려 전쟁: 역사를 바꾼 두 전투 이야기 (0) | 2025.09.04 |
| 백제·신라와 남조 왕조: 외교·불교 전래 네트워크 (0) | 2025.09.03 |